죽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간절히 살고 싶다는 반증이었던 탓일까요. 약국에서 사 모은 수면제가 사실은 그냥 소화제였고 연탄불이 도중에 꺼지는 바람에 그마저도 어설픈 소동으로 끝나버렸어요.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교복 한 번 못입어 본 청춘이지만 여자친구는 한 번 사귀어 보고 죽어야겠다고요. 그리고 다시 떠나왔던 시계공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입 검정고시 합격증을 따고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공장에선 이제사 취업연령이 되어 이재명이라는 제 이름을 찾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어요.
아니 변한 게 하나 더 있긴 했어요. 데이트라도 한 번 하고 죽자는 결심 때문에 용기를 부려보게 되었어요. 그만두기 전부터 좋아했던 검사실 단발머리 소녀에게 말을 걸었죠. 보기 좋게 거절당하긴 했지만말이에요.
한동안 저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어요. 공장에선 동료들과 장난치고 놀고, 집에선 아까운 전깃불 쓰는 대신 TV를 보며 뒹굴거리며 아무도 불편해 하지 않을 평범한 소년공, 모범적인 공돌이로 지냈어요.
그러나 그런 저를 유일하게 나무란 것은 큰형이었어요. 비록 자신은 공장을 다니지만 동생들은 공부를 해서 더 나은 길로 가주길 바랐거든요.
시간이 지나며 저 역시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이래선 안되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등록금이 없어 대학엘 못 가더라도 공부하는 모습은 다시 보여줘야겠구나 하고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장애물들은 놓여 있었지만 다시 출발선에 선 저에게 조금씩 훈풍도 불기 시작했어요.
그해 정부는 과외 금지로 원성이 높아지자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특별 장학금을 주겠다는 발표를 했고, 아버지도 공장에 계속 다닌다는 조건으로 제 월급 일부를 학원비와 책값으로 써도 좋다고 허락을 하셨거든요.
근절되지 않는 공장폭력이 때로 발목을 잡을 때도 있었고, 학원비를 못내 다시 돈을 모을 때까지 TV 과외로 독학을 하기도 하면서, 예비고사가 없어지고 생겨난 학력고사 준비를 했습니다.
시험 날이 다가올수록 가장 필요한 게 시간이었던 저는 마지막 4개월은 공장을 그만두고 모은 월급으로 버텼지요.
그때부터 죽음과의 전쟁이었어요. 볼펜촉이니 압정이니 안 써 본 방법이 없었고 잠이 올까봐 한겨울에도 담요를 치우고 배부르면 안된다고 도시락도 한 끼만 먹으며 견뎠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날은 왔어요. 저는 그 많은 우여곡절이 거짓말 같이 높은 점수를 손에 쥐게 되었어요. 주위에선 그 점수로 못갈 대학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가 고른 기준은 합격점 높은 대학 학과가 아니라 얼마나 후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가였어요.
그렇게 그해 진달래 만발한 봄날 중앙대 법과대학 교정에선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입학 사진을 찍고 있었답니다.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은 어머니 와 시장통에서 산 새 교복을 입고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 아들이요.
댓글